You can read about my approach to translation in English here.
텍스트는 데이터다
문화유산 번역을 디지털 큐레이션의 눈으로 본다는 것
저는 어떤 번역자인가
번역자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소설이나 시를 옮기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원문의 결을 살리고, 문장의 리듬을 고민하고, 하나의 낱말을 두고 며칠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번역자가 아닙니다. 문학 작품을 옮기지 않고, 번역을 예술적 작업으로 접근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한국의 문화유산을 외국인 독자에게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국가유산 안내판, 박물관 전시 설명문, 교육 자료, 학술지 초록이 제 작업의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을 번역자로서만이 아니라 디지털 큐레이터로서 합니다.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 인문정보학을 공부했고, 그 기간 내내 문화유산 번역을 함께 해 왔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6,000건이 넘는 안내판 문안을 다루었고,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인문학연구소의 동료들과 함께 국가유산청의 안내판 지침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두 가지 배경이 만나는 지점에서 저는 텍스트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안내판 하나는 하나의 글이기 전에, 수천 개의 다른 텍스트와 연결되어야 하는 하나의 데이터입니다.
이름은 데이터다
전시장 벽에 인쇄된 설명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관람객은 안내판에서 본 이름을 휴대전화로 검색하고, 인공지능에 묻습니다. 기관은 같은 텍스트를 누리집에 올리고, 데이터베이스에 넣고, 언젠가는 다른 기관의 자료와 연결하려 합니다.
이때 같은 유산이 기관마다 다른 영어 이름으로 적혀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관람객은 그것이 같은 곳인지 알 수 없고, 검색은 둘을 연결하지 못합니다. 같은 대상을 다섯 가지 방식으로 불렀다면, 그 다섯 가지를 연결하는 작업이 누군가에게 남습니다. 인공지능은 공개된 문안을 학습하므로, 우리의 표기가 흩어져 있을수록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인공지능의 답도 부정확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번역어가 가장 옳은가”보다 “모두가 같은 표기를 쓰고 있는가”를 먼저 봅니다. 더 나은 번역어를 찾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틀리지 않은 표기라면, 여러 표기가 제각각 흩어져 있는 것보다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훨씬 큰 가치를 갖습니다. 이것이 제가 정부의 표기 기준을 가장 먼저 따르는 이유입니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 「국가유산명칭 영문표기 기준 규칙」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따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지침을 따르는 일은 사소해 보입니다. 괄호 앞을 띄우는가, 명문이 있는 유물의 이름을 어떤 형식으로 쓰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데이터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런 세부가 전부입니다. 한 글자가 다르면 컴퓨터에게는 다른 이름입니다.
지침은 있는데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
기준은 이미 있고,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의 영문 텍스트를 보면 기준과 맞지 않는 표기를 자주 만납니다. 저는 이 기관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누군가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유는 대부분 구조에 있습니다.
첫째, 공공기관의 담당자는 대부분 순환 보직으로 일합니다. 영문 표기 기준을 익힐 만하면 다른 부서로 옮겨 가고, 후임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기준을 오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기관 안에 남지 않습니다.
둘째, 번역은 대개 외주로 이루어지고, 담당자가 영어 전문가가 아닌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받은 결과물이 기준에 맞는지 확인할 수단이 기관 안에 없습니다.
셋째, 국문 텍스트는 국립국어원의 감수를 거치는 등 다듬는 과정이 있지만, 영문 텍스트에는 그에 해당하는 단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번역은 본 작업이 끝난 뒤 남은 시간과 예산으로 처리하는 마지막 단계가 되기 쉽습니다.
넷째, 대규모 사업일수록 여러 업체와 여러 번역자가 여러 해에 걸쳐 나누어 작업합니다. 공유하는 용어집이 없으면 같은 용어가 제각각으로 옮겨지고, 영어로 풀어 쓸 수 있는 말이 로마자 표기로 남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각 기관은 주어진 자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결과, 기준을 확인하는 사람이 과정의 어디에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국가유산명칭 영문표기 기준 규칙」에 따르면 명문이 있는 유물의 이름은 “with Inscription of” 형식을 씁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2026년 9월 현재, 2024년에 지정된 ‘천수원’명 청동북의 영문 명칭은 다음과 같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Bronze Gong inscribed with “Cheonsuwon” (Cheonsuwon Temple)
기준 규칙을 따르면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Bronze Gong with Inscription of “Cheonsuwon”
큰 차이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유형의 유물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등록되어 있으면, 하나의 검색이나 하나의 규칙으로 그 유물들을 함께 찾고 처리할 수 없게 됩니다. 2026년에 지정된 물때의 영문 명칭 “Multtae(Knowledge of tide)”에서도 괄호 앞의 띄어쓰기와 괄호 안의 대소문자가 기준과 다릅니다.
이 예를 드는 것은 누군가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준을 만든 기관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이것이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새 이름이 등록되기 전에 기준 규칙과 대조해 보는 단계가 있었다면 걸렸을 것입니다. 그 단계가 없었을 뿐입니다.
제가 하는 일
저는 바로 그 단계가 되고자 합니다. 담당자가 바뀌어도 기준을 계속 기억하고 있는 사람, 받은 텍스트를 기준에 비추어 확인해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일을 합니다.
- 기준에 따른 번역과 감수. 정부 표기 기준과 시카고 매뉴얼을 따르고, 공식 명칭도 기준 규칙에 부합하는지 확인합니다. 맞지 않는 부분은 근거와 함께 알려 드립니다.
- 기관의 표기 지침과 용어집 구축. 여러 번역자가 여러 해에 걸쳐 작업해도 일관성이 유지되도록, 기관에 맞는 기준을 문서로 만듭니다. 기준이 문서로 있어야 담당자가 바뀌어도 남습니다.
- 대규모 텍스트의 일관성 점검. 수백, 수천 건의 텍스트를 데이터로 다루어 용어와 표기가 어디서 어긋나는지 찾아냅니다. 인문정보학의 방법이 가장 직접적으로 쓰이는 부분입니다.
- 시안 검토. 번역문이 디자인 파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복사·붙여넣기 오류, 이탤릭체 누락, 조판 문제를 인쇄 전에 확인합니다.
제가 작업할 때 실제로 따르는 세부 기준은 [문화유산 영문 텍스트 작업 기준]에 공개해 두었습니다.
몇 가지 제안
마지막으로, 영문 텍스트를 만드는 기관에 조심스럽게 몇 가지를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영문 텍스트를 국문과 같은 무게로 다루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외국인에게 영문 텍스트는 그 기관의 얼굴이고, 나아가 한국의 얼굴입니다. 특히 정부 기관과 국공립 박물관의 영문 텍스트는 그 자체로 다른 기관과 번역자들이 참조하는 기준이 되므로, 그 영향은 기관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대규모 번역 사업을 시작하실 때에는 기준을 먼저 정하시기를 권합니다. 어떤 표기 지침을 따를지, 어떤 용어집을 쓸지를 먼저 정하고 그 기준으로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분량을 만들었는가보다 오래 남는 가치가 됩니다.
번역자를 선정하실 때에는 정부의 기본 표기 지침을 알고 따르는지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번역의 품질 전부를 말해 주지는 않지만, 그 번역자가 현재의 기준을 얼마나 파악하고 세부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는지는 보여 줍니다.
그리고 저는 공공기관의 번역을 누가 했는지가 결과물에 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공공기관의 영문 텍스트는 세금으로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믿고 참조합니다. 이름을 걸고 품질을 책임지는 것은 번역자의 몫이며, 저부터 그렇게 일하고자 합니다.
마치며
저는 번역에서 아름다운 문장보다 정확하고 일관된 데이터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국의 문화유산이 디지털 환경에서 제대로 검색되고, 연결되고, 이해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 공감하시거나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다면 연락처 페이지로 편하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2026년 9월
